[2013] 중앙일보ㅣ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ㅣ황은주 신춘문예

삼만 광년을 풋사과의 속도로


  아삭, 창문을 여는 한 그루 사과나무 기척
  사방四方이 없어 부푸는 둥근 것들은 동쪽부터 빨갛게 물들어간다
  과수원 중천으로 핑그르르
  누군가 붉은 전구를 돌려 끄고 있다
  당분간은 철조망의 계절

  어두워진 빨강, 눈 밖에 난 검은 여름이
  여름 내내 흔들리다 간 곳에
  흔들린 맛들이 떨어져 있다
  집 한 채를 허무는 공사가 한창이고
  유독 허공의 맛을 즐기는 것들의 입맛에는 어지러운 인이 박여 있다

  죽은 옹이는 사과의 말을 듣는 귀
  지난 가을 찢어진 가지가 있다고 그건 방향의 편애
  북향에도 쓸모 없는 편애가 한창이다

  비스듬한 접목한 자리
  망종 무렵이 기울어져 있어 씨 뿌리는 철
  서로 모르는 계절이 어슬렁거리는 과수원

  바람을 가득 가두어 놓고 있는 철조망
  사과는 지금 황경 75도
  윗목이 따뜻해졌는지 기울어진 사과나무들
  이 밤, 철모르는 그믐달은
  풋사과처럼 삼만 광년을 달릴지도 모른다


- 황은주 저
- 2013 신춘문예 당선시집ㅣ문학세계사ㅣ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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