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동아일보ㅣ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ㅣ유병록 신춘문예

붉은 호수에 흰 병 하나


  딱, 뚜껑을 따듯
  오리의 목을 자르자 붉은 고무 대야에 더 붉은 피가 고인다

  목이 잘린 줄도 모르고 두 발이 물갈퀴를 젓는다
  습관의 힘으로 버티는 고통
  곧 바닥날 안간힘
  오리는 고무 대야의 벽을 타고 돈다

  피를 밀어내는 저 피의 힘으로 한때 오리는 구름보다 높이 날았다
  죽은 바람의 뼈를 고향으로 운구하거나
  노을을 끌고 툰드라 지대를 횡단하기도 하였다

  그런 날로 돌아가자고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더 세차게 뿜어져 나오는 피

  날고 헤엄치고 걷게 하던 힘이 쏟아진다
  숨과 울음이 오가던 구멍에서 비명처럼 쏟아진다

  아니, 벌써 따뜻한 호수에 도착했나
  발 아래가 방금 전까지 제 안쪽을 흘러다니던 뜨거운 기운인 줄 모르고
  두 발은 계속 물갈퀴를 젓는데
  조금씩 느려지는데

  오래 쓴 연필처럼 뭉뚝한 부리가 붉은 호수에 떠 있는 흰 병을 바라본다
  한때는 제 몸통이었던 물체를
  붉은 잉크처럼 쏟아지는 내용물을 바라본다

  길고 길었던 여정이 이처럼 간단히 요약되다니!

  목 아래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
  발 담갔던 호수들을 차례로 떠올리는 오리는
  목이 마르다
  흰 병은 바닥난 듯 잠잠하지만
  기울이면 그래도 몇 모금의 붉은 잉크가 더 쏟아질 것이다


- 유병록 저
- 2010 신춘문예 당선시집ㅣ문학세계사ㅣ2010년 1월

덧글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