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는 사람들로 하여금 쉬지 못하게 하는 것이 네 가지라고 말한다.
하나는 수명이고 둘은 명예이며 셋은 지위, 넷은 재화다. 이 네 가지를 욕심내는 사람은 그 욕심 때문에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수명을 욕심내는 사람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명예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두려워한다. 또 명예를 욕심내는 사람은 권세를 두려워하게 되고 재화를 욕심내는 사람은 형벌을 두려워하게 된다. 이렇게 외부의 대상을 욕심내는 사람은 죽이는 것도 쉽고 살리는 것도 쉽다. 자신의 명命을 지배하는 힘이 밖에 있기 때문이다.
양주는 장수하고 명예를 얻으며 높은 지위에 오르고 부를 얻으려 하는 순간 삶은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고 충고한다. 자기 밖에 있는 것들을 욕심내느라 불필요한 두려움에 빠지게 되고 결국 두려움 속에서 외부의 조건에 휩쓸리는 수동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욕심이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이 다시 나를 얽매이게 한다.
양주는 바깥에 있는 것을 쫓는 욕심이 사람을 쉬지 못하게 한다고 경고한다. (...) 내가 쉬지 못하고 끝없이 두려워하는 것은 나의 삶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외물들을 추구함으로써 자기 삶의 중심을 밖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양주학파는 삶을 네 단계로 나눈다. 가장 좋은 삶은 자기 생명을 귀하게 여겨 생명의 조건들을 충분히 채우며 사는 삶이다. 이를 완전한 삶이라 부른다. 온전한 삶은 인간이 타고난 욕망이 모두 적절히 충족되는 상태다. 이보다 못한 다음 단계의 삶은 타고난 욕구를 다 채우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충족하는 삶이다. 완전히 채우지 못했다고 해서 결핍된 삶이라고 부른다. 결핍된 삶보다 더 못한 것이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죽음이다.
죽음보다 더 못한 삶이 있다. 그것은 핍박받는 삶이다. 핍박받는 삶은 타고난 욕망이 아무것도 충족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들만 얻은 것으로 굴욕적이며 치욕적으로 살아가는 상태다. 핍박받는 삶은 죽음보다 못하다. 죽음에는 없는 고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가 능력이며, 시간이며 또 내가 얻으려는 타인의 마음이기도 한 '만능'의 도구라는 사실은 쉽게 부정되지 않는다. 그래도 아마 부를 곧 행복의 절대적 조건이라고 선뜻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별로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부가 그다지 확실한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쾌락주의자로 알려진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에 따르면 모든 삶의 목적은 쾌락이다. 모든 인간은 자연적으로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한다. 욕망이 충족되어 기쁨이 충만한 상태가 곧 행복이다. 이때 행복은 순간적인 쾌락이어서는 안 되며 비교적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상태가 유지되어야 한다. 순간적인 욕망의 충적인 일시적인 기쁨을 주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밀려오는 공허감으로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공자에게는 각각 출신이 다른 수십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안회의 삶은 특히 궁핍하고 불우했다. 공자는 이런 안회에 대해 '학문을 좋아하며 자기의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았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 않았던', 궁핍한 삶의 조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어진 사람이고 평가한다.
안회를 비롯한 유가儒家에게 즐거움이란 좋아함이나 기쁨 같은 마음의 어떤 상태가 아니다. 이들이 말하는 즐거움이란 안으로도 밖으로도 결여가 없는 충만함으로, 마음과 몸, 생각과 느낌, 앎과 실천이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 안회라면 가난한 것을 즐긴 것이 아니라, 또 가난에 얽매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가난했던 적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상관없다거나 아예 초탈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삶의 조건을 방해로 느끼지 않았을 만큼 안과 밖에서 모두 만족감과 행복을 누렸던 것이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행복에 기여한다고 여겨지는 '선' 또는 불행하게 만든다고 여겨지는 '악'도 사실 행복이나 불행에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죽음은 선도 악도 아니며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 우리에게 죽음 자체는 악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하나는 수명이고 둘은 명예이며 셋은 지위, 넷은 재화다. 이 네 가지를 욕심내는 사람은 그 욕심 때문에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수명을 욕심내는 사람은 귀신을 두려워하고 명예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두려워한다. 또 명예를 욕심내는 사람은 권세를 두려워하게 되고 재화를 욕심내는 사람은 형벌을 두려워하게 된다. 이렇게 외부의 대상을 욕심내는 사람은 죽이는 것도 쉽고 살리는 것도 쉽다. 자신의 명命을 지배하는 힘이 밖에 있기 때문이다.
양주는 장수하고 명예를 얻으며 높은 지위에 오르고 부를 얻으려 하는 순간 삶은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다고 충고한다. 자기 밖에 있는 것들을 욕심내느라 불필요한 두려움에 빠지게 되고 결국 두려움 속에서 외부의 조건에 휩쓸리는 수동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욕심이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이 다시 나를 얽매이게 한다.
양주는 바깥에 있는 것을 쫓는 욕심이 사람을 쉬지 못하게 한다고 경고한다. (...) 내가 쉬지 못하고 끝없이 두려워하는 것은 나의 삶에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외물들을 추구함으로써 자기 삶의 중심을 밖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양주학파는 삶을 네 단계로 나눈다. 가장 좋은 삶은 자기 생명을 귀하게 여겨 생명의 조건들을 충분히 채우며 사는 삶이다. 이를 완전한 삶이라 부른다. 온전한 삶은 인간이 타고난 욕망이 모두 적절히 충족되는 상태다. 이보다 못한 다음 단계의 삶은 타고난 욕구를 다 채우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충족하는 삶이다. 완전히 채우지 못했다고 해서 결핍된 삶이라고 부른다. 결핍된 삶보다 더 못한 것이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죽음이다.
죽음보다 더 못한 삶이 있다. 그것은 핍박받는 삶이다. 핍박받는 삶은 타고난 욕망이 아무것도 충족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들만 얻은 것으로 굴욕적이며 치욕적으로 살아가는 상태다. 핍박받는 삶은 죽음보다 못하다. 죽음에는 없는 고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가 능력이며, 시간이며 또 내가 얻으려는 타인의 마음이기도 한 '만능'의 도구라는 사실은 쉽게 부정되지 않는다. 그래도 아마 부를 곧 행복의 절대적 조건이라고 선뜻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별로 없을 것이다. 그것은 부가 그다지 확실한 수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쾌락주의자로 알려진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에 따르면 모든 삶의 목적은 쾌락이다. 모든 인간은 자연적으로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한다. 욕망이 충족되어 기쁨이 충만한 상태가 곧 행복이다. 이때 행복은 순간적인 쾌락이어서는 안 되며 비교적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상태가 유지되어야 한다. 순간적인 욕망의 충적인 일시적인 기쁨을 주지만 그 순간이 지나면 밀려오는 공허감으로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공자에게는 각각 출신이 다른 수십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안회의 삶은 특히 궁핍하고 불우했다. 공자는 이런 안회에 대해 '학문을 좋아하며 자기의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았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 않았던', 궁핍한 삶의 조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어진 사람이고 평가한다.
안회를 비롯한 유가儒家에게 즐거움이란 좋아함이나 기쁨 같은 마음의 어떤 상태가 아니다. 이들이 말하는 즐거움이란 안으로도 밖으로도 결여가 없는 충만함으로, 마음과 몸, 생각과 느낌, 앎과 실천이 하나가 된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 안회라면 가난한 것을 즐긴 것이 아니라, 또 가난에 얽매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가난했던 적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상관없다거나 아예 초탈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삶의 조건을 방해로 느끼지 않았을 만큼 안과 밖에서 모두 만족감과 행복을 누렸던 것이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행복에 기여한다고 여겨지는 '선' 또는 불행하게 만든다고 여겨지는 '악'도 사실 행복이나 불행에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죽음은 선도 악도 아니며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 우리에게 죽음 자체는 악이 될 수 없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 김선희 저
- 철학이 나를 위로한다ㅣ예담ㅣ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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