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철학이 나를 위로한다ㅣ나는 왜 끊임없이 욕망하는가 인문

 자본은 즉물적인 질료가 아니라 오로지 그 위에 얹힌 기호에서 상품성을 본다. 가죽 백이 아니라 가죽 백에 새겨진 명품의 로고가 상품성을 가진다. 이처럼 기호가 자본과 결합하면 하나의 코드가 되고 더 나아가 문화적 자본이 된다. 그에 따라 이 상품들은 문화적 소비재로서, 물질을 넘어 사회적 의미망 안에서 새롭게 유통된다.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명품은 일반적인 생산-소비 관계를 뛰어넘는다. 그 결과 산물이 그 지역에서 소비되던 시대에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권력이 발생한다. 세계를 상대로 대자본이 취향의 권력을 만들어내고 사람들은 이 취향의 권력에 쉽게 굴복한다. 문화적 소비를 통해 일반적인 소비에서는 맛볼 수 없는 권위와 자긍심을 체험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악어 가죽 위의 '기호'에 열광하며 사이비 종교 신도처럼 찬양의 수사에 몰입한다.

 욕망이 제각각이듯 결여도 사람마다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욕망이 아니라 결여 자체가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구성되고 구조화된다. 사회는 우리에게 무엇을 욕구할지보다 무엇을 부족한 것으로 여길지를 먼저 가르쳐준다. 따라서 개인이 무엇을 결여로 느껴야 하는지는 철저히 사회적 맥락 안에서 결정되고 내면화된다. 나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고 배우기 때문에 거기에 무엇인가를 채우려는 행동을 자연스럽고 중립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대중매체를 통해 학습한 것들을 실질적으로 제품을 구매함으로써 실습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실습을 과시함으로써 복습한다. 이것이 현대사회의 소비 매커니즘이고 욕망이 창출되고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소비가 행복으로 둔갑하는 과정이다. 물론 소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소비를 통한 욕망의 충족 자체를 부정할 수 없다. 더 좋은 것, 더 아름다운 것, 더 세련된 것을 원하는 욕망이 실현되었을 때 누구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 문제는 '더 좋은 것'이 오로지 경제적 능력으로만 접근 가능하다고 여기는 풍토다.

 우리는 경험적으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보다는 무언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더 극악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인간을 인간 이하로 만드는 이 극악함, 비굴함과 치졸함은 당연하게도 모두 욕망에서 온 것이다. 욕망이 고통의 원인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의 변치 않는 진리다. 그래서 일찍이 수많은 성인과 현자,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욕망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해왔다. 불교의 가르침 역시 욕망에 대한 경고로부터 시작된다. 모든 삶은 다 고통이다. 우리가 고통스러운 것은 욕망 때문이다. 물론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중립적인 욕망 즉 '선욕善欲'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욕망을 넘어서는 지나친 욕망인 '갈애渴愛'가 문제다.
 갈애는 순간적으로 쾌락을 주지만 궁극적으로는 나를 망가뜨리는 파괴적인 욕망이다. 갈애에 사로잡힌 인간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진정한 모습을 바라보지 못한다. 고통은 여기서 온다. 자신과 세계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만드는 집착이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불교는 이 갈애를 끊는 것이 집착으로부터의 해방이자 고통의 소멸로서의 해탈이라고 가르친다.

 근대 합리주의 철학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네덜란드의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Benedict de Spinowa, 1632~1677다. 스피노자는 인간의 본질을 이성이나 자유의지로 보는 다른 철학자들과 달리 욕망에서 찾는다.
 네덜란드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태어난 스피노자는 자연에 목적이나 인격적인 신의 뜻이 담겨 있다는 생각을 부정하고 자연 전체를 하나의 기계처럼 보고자 한다. 그의 철학은 기독교나 유대교의 전통적인 신 관념을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기존 종교와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스피노자는 자신이 성장한 유대교 사회에서 파문당한 채 당시로써는 첨단 기술인 광학기의 렌즈를 깎으며 독창적이며 독자적인 자기 사상을 완성한다.
 전통적으로 신은 전혀 물질적인 요소가 없는 순수한 사유의 존재로, 인격적이며 초월적인 방식으로 자연과 인간 세계를 창조했다고 여겨졌지만 스피노자는 인격적이며 오로지 사유로만 존재하는 신 관념을 버리고 자연의 물질성까지 신의 속성으로 바라본다. 인간을 포함해 자연 전체가 신의 양태이며 따라서 신 안에 들어 있다. 신은 자연의 원인이지만 초월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이다. 신의 결과가 자연이 아니라 신이 곧 자연이라는 의미다. 이 자연 세계는 인격적 신의 초월적 계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과관계의 법칙에 따라 성립된 합리적인 세계다.

 욕망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한다. 여기에는 신에 의한 목적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자연은 원인과 결과의 연쇄로 이루어진 합리적 질서의 세계일 뿐 신의 계시나 뜻과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 역시 외부의 어떤 초월적인 원인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자연의 필연성을 따를 뿐이다.

 스피노자에게 욕망은 배제되거나 통제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그는 도리어 자기 보존의 노력으로서의 욕망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구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은 자기 보존의 노력과 실현을 통해 끝없이 자신을 향상시키고 완성해나가야 한다. 인간이 자기 보존의 노력을 통해 완전성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적 노력을 통해 자기 보존에 이익이 되는 것을 찾고 실천함으로써 자신에게 선이 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다. 스피노자는 인간이 자기 존재를 유지하고 완성하려는 욕망을 긍정함으로써 인간이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든다. 인간에게 행복은 이 긍정에서 출발한다.
 스피노자의 관점을 따를 때 우리는 욕망을 이성이 꺾고 눌러야 할 어두운 내부의 충동으로 보지 않을 수 있다. 인간에게 욕망은 자신을 보존하게 하고 긍정하게 하며 완성시킬 수 있도록 만드는 행복의 길이다. 이성적 존재로서 인간은 자기를 보존하고 긍정하려는 욕망을 통해 더 자유롭고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욕망은 인간이 인간답게 또는 인간을 넘어서게 하는 긍정과 확장의 힘이 된다. 


- 김선희 저
- 철학이 나를 위로한다ㅣ예담ㅣ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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