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타락을 성적 수치심에서 찾는 기독교적 전통에서 이런 식의 성적 욕망은 곧 죄와 수치로 여겨졌고 언제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왔다. 그래서 고안된 것이 결혼이다. 예수의 제자 바울은 성적 욕망을 통제할 수 없다면 차선의 방법으로 결혼을 택하라고 권한다. 바울 이후로 기독교 문화권에서 결혼은 성적 욕구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생물학적 본능을 통제하는 사회적 도구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개인이 시대의 중심이 된 근대사회에서 결혼은 성욕 통제의 차원을 넘어서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결혼은 사랑이라는 매우 사적인 감정 상태에 놓인 자유로운 개인 간의 낭만적인 결합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특히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수없이 쏟아져 나온 소설과 영화, 드라마가 낭만적 결합으로서의 사랑의 환상을 점점 부풀려갔다. 사랑과 결혼의 낭만성이 얼마나 상업적일 수 있는가를 보여줬던 대중문화 덕분에 현대인들은 결혼을 사랑과 성에 대한 개인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확인시켜주는 자유의 상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의 정신이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단계로 발전한다고 말한다.
낙타는 짐을 지고 사막을 걸어야 한다. 짐이란 정신의 복종, 굴종, 자기 고행의 태도를 상징한다. 짐을 지고 있는 낙타는 고행하는 삶, 주이어진 전통과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에 대해 순종하는 태도를 말한다.
낙타의 삶은 무겁고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안정되고 편안하다. 모든 것이 주인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해야만 한다'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스스로 결정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도피처가 된다. 결국 낙타는 정신적 안정을 대가로 변화와 생성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의 이름표가 될 것이다. 이들은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기존의 가치 체계를 신봉하며, 이를 내세워 자신의 상태를 변명하고 합리화한다.
낙타의 단계는 관계에 자신을 종속시키고 스스로를 지우는 단계다. 자신이 마모될 때까지 끝까지 낙타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마모의 끝에서 불현듯 떨치고 일어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자기를 더 이상 지울 수 없음을 자각하는 그런 순간을 만나게 된다.
굴종적인 낙타의 단계를 스스로 부정하면 사자가 될 수 있다. 사자는 낙타일 때 등에 지고 있던 짐을 벗어 던짐으로써 굴종과 순종에서 일어나는 존재다. (...) 낙타가 '나는 해야만 한다'의 정신으로 살았다면 사자는 '나는 할 것이다'의 정신으로 향한다. 사자는 말 그대로 기존의 전통과 가치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사자가 곧 한계에 부딪히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의 등에 얹혀 있었던 짐은 벗었지만 어디로 향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자는 부정만 할 수 있을 뿐 긍정에 이르지 못한다. 진리로 여겨졌던 고정된 가치들을 거부했지만 기존의 가치를 대신할 새로운 가치를 스스로 창조할 수는 없다. 전통적 가치는 벗어났지만 새로운 지향도 찾지 못한 채 사막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방향이 명확하지 않는 자유,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없는 자유는 결국 일시적인 자기만족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니체는 사자의 단계에서 벗어나 그 다음으로 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어리아이의 단계다. 차라투스트라는 어린아이가 '천진난만함이자 망각,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라고 말한다. 어린아이는 과저의 것을 바탕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어린아이에게는 어떤 권위도 전통도 의미가 없다. 외부의 힘이 아니라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처럼 어린아이는 스스로 늘 새롭다. 어린아이는 주변의 모든 것을 놀이의 대상으로 삼는다.
니체의 관점을 따른다면 결혼과 가족으로서의 삶이란 어린아이의 단계를 향해 구성원 각자가 부단히 개인적 투정을 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도 하나의 가치를 향해 자기를 지우지 않으며, 각자 자기를 넘어서도록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존재여야 한다. 누군가에게 속박되어서도 안 되며 또 누군가를 지배하려는 욕망에서도 벗어나 개체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타인도 그만큼 인정하는 상태로 바로 의미 있는 결혼이며 가족의 삶일 것이다.
개인이 시대의 중심이 된 근대사회에서 결혼은 성욕 통제의 차원을 넘어서 새로운 의미를 얻게 된다. 결혼은 사랑이라는 매우 사적인 감정 상태에 놓인 자유로운 개인 간의 낭만적인 결합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특히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면서 수없이 쏟아져 나온 소설과 영화, 드라마가 낭만적 결합으로서의 사랑의 환상을 점점 부풀려갔다. 사랑과 결혼의 낭만성이 얼마나 상업적일 수 있는가를 보여줬던 대중문화 덕분에 현대인들은 결혼을 사랑과 성에 대한 개인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확인시켜주는 자유의 상징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인간의 정신이 낙타, 사자, 어린아이의 단계로 발전한다고 말한다.
낙타는 짐을 지고 사막을 걸어야 한다. 짐이란 정신의 복종, 굴종, 자기 고행의 태도를 상징한다. 짐을 지고 있는 낙타는 고행하는 삶, 주이어진 전통과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에 대해 순종하는 태도를 말한다.
낙타의 삶은 무겁고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안정되고 편안하다. 모든 것이 주인의 뜻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해야만 한다'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스스로 결정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도피처가 된다. 결국 낙타는 정신적 안정을 대가로 변화와 생성을 스스로 포기한 사람들의 이름표가 될 것이다. 이들은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기존의 가치 체계를 신봉하며, 이를 내세워 자신의 상태를 변명하고 합리화한다.
낙타의 단계는 관계에 자신을 종속시키고 스스로를 지우는 단계다. 자신이 마모될 때까지 끝까지 낙타의 삶을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마모의 끝에서 불현듯 떨치고 일어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자기를 더 이상 지울 수 없음을 자각하는 그런 순간을 만나게 된다.
굴종적인 낙타의 단계를 스스로 부정하면 사자가 될 수 있다. 사자는 낙타일 때 등에 지고 있던 짐을 벗어 던짐으로써 굴종과 순종에서 일어나는 존재다. (...) 낙타가 '나는 해야만 한다'의 정신으로 살았다면 사자는 '나는 할 것이다'의 정신으로 향한다. 사자는 말 그대로 기존의 전통과 가치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사자가 곧 한계에 부딪히는 것은 당연하다. 자신의 등에 얹혀 있었던 짐은 벗었지만 어디로 향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자는 부정만 할 수 있을 뿐 긍정에 이르지 못한다. 진리로 여겨졌던 고정된 가치들을 거부했지만 기존의 가치를 대신할 새로운 가치를 스스로 창조할 수는 없다. 전통적 가치는 벗어났지만 새로운 지향도 찾지 못한 채 사막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방향이 명확하지 않는 자유, 스스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없는 자유는 결국 일시적인 자기만족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니체는 사자의 단계에서 벗어나 그 다음으로 향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어리아이의 단계다. 차라투스트라는 어린아이가 '천진난만함이자 망각,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라고 말한다. 어린아이는 과저의 것을 바탕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어린아이에게는 어떤 권위도 전통도 의미가 없다. 외부의 힘이 아니라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처럼 어린아이는 스스로 늘 새롭다. 어린아이는 주변의 모든 것을 놀이의 대상으로 삼는다.
니체의 관점을 따른다면 결혼과 가족으로서의 삶이란 어린아이의 단계를 향해 구성원 각자가 부단히 개인적 투정을 해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도 하나의 가치를 향해 자기를 지우지 않으며, 각자 자기를 넘어서도록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존재여야 한다. 누군가에게 속박되어서도 안 되며 또 누군가를 지배하려는 욕망에서도 벗어나 개체로서의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고 타인도 그만큼 인정하는 상태로 바로 의미 있는 결혼이며 가족의 삶일 것이다.
- 김선희 저
- 철학이 나를 위로한다ㅣ예담ㅣ2012년 1월
- 철학이 나를 위로한다ㅣ예담ㅣ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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