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철학이 나를 위로한다ㅣ나는 왜 일해야 하는가 인문

 그리스인들이 노동을 증오한 것은 노동이 이성을 가진 인간을 물질의 세계에 섞어 들어가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세계의 근원이나 질서에 대해 연구함으로써 변화하는 자연과 현상 세계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했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일을 '소명call'으로 정의했다. 신이 인간 각자에게 내린 소명이 곧 일이기 때문에 자기 직업에 충실한 것은 신에게 응답하는 인간의 당연한 의무로 여겨졌다. 또한 모든 일은 신이 부여한 명령이기 때문에 나름의 가치가 인정된다. 또 다른 종교개혁가 칼뱅에 이르면 노동은 보다 고결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노동은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인간의 임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루터나 칼뱅이 보여준 새로운 노동관을 통해 사람들은 쾌락을 멀리하고 노동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노동을 통해 축적된 부를 신의 축복으로 여기게 된다. 이런 노동관이 근대 자본주의 발달의 바탕이 되었다는 점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오스트리아 출신 철학자 이반 일리치Ivan lllich, 1926~2002는 이런 은폐된 노동을 '그림자 노동'이라고 부른다. 그림자 노동이란 임금 노동 체계를 유지시키는데 이용되는, 실제로는 지불되지 않는 노동을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여성의 가사 노동이다. 일리치에 따르면 여성의 노동이 마치 그림자처럼 가정 안에서 은폐된 것은 산업사회가 임금 노동에만 주목하고 여성의 노동을 재생산 활동으로 한정했기 때문이다. 여성이 신체적, 정신적 특성 때문에 가사 노동에 적합하다는 논리 역시 일종의 신화로, 산업사회에서 성별에 따른 분업과 경제적 차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허구적 논리라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배려와 보살핌이 여성의 본질적 특성이라기보다는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에게 덧씌운 틀어 불과하며 여성이 배려와 보살핌을 위한 노동에 헌신하게 된 것은 가부장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생존 전략이었음을 지적한다.

 헤겔은 인간이 의식을 가진 존재이며, 인간의 의식은 자기와 다른 모든 것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성립한다고 말한다. 나의 밖에 있는, 나와는 다른 타자는 비본질적인 것으로 배제되어야 할 존재다. 의식은 자기동일성을 얻기 위해, 즉 자기 자신으로 있기 위해 나와 다른 타자를 끊임없이 부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 이상의 의식이 만나면 생사를 건 투쟁이 시작된다. 서로를 타자로서 배제해야만 내가 나로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자를 부정하는 과정은 나에게도 되돌아온다. 나를 상대하는 다른 사람도 나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타자가 죽는다고 해서 내가 이 투쟁에서 해방되는 것은 아니다. 타자가 죽어버리면 결국 부정을 통해서 유지하던 나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고 동시에 나를 나로 확신할 수 있게 해주던 대상이 사라진다. 그 결과 나는 의식으로서의 생동감을 잃는다.
 결국 의식으로서 사는 인간은 서로 인정받기 위해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 나를 살아 있게 하고 의식을 생동감 있게 하려면 자신을 인정할 타자가 필요하지만 동시에 자신으로 있기 위해 타자를 부정해야 한다. 이 과정을 헤겔은 인정투쟁이라고 부른다. 이 인정투쟁의 과정을 헤겔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설명한다. 스스로 주권을 얻기 위해 의식은 타자를 자기 밑에 종속시키고자 한다. 타인을 복속시켜 자신의 명령을 관철하게 된 존재를 주인이라 한다. 이에 비해 노예는 자신을 사물처럼 여기기고 주인을 위한 도구처럼 생각하면서 복종을 내면화한 상태다. 
 주인은 노예를 부림으로써 자신의 독립성을 얻지만 노예는 자립성을 포기하고 주인의 명령에 복종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가 정착되면 주인과 노예는 기대하지 않았던 경험을 하게 된다. 서로의 관계가 역전되는 것이다. 자기 의지대로 노예를 부리는 주인이 자주적이고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사실 종속되어 있는 것은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다. 노예가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주인은 주인으로 설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인은 노예 없이 주인의 자리에 있을 수 없고 의식으로서도 생동감을 잃는다. 주인의 자주성은 오로지 노예의 인정에서 나온다. 
  
 한편 노예 역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노동을 하는 동안 노예는 주인의 명령에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노예는 주인의 의지를 넘어서는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게 된다. 노예가 자연을 대상으로 한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연물을 변형시키고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자연물, 그리고 사물의 세계와 교류하는 동안 노예는 자기만의 요령과 기술을 체득하면서 사물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것은 노동의 힘이며, 노동을 통한 세계와 그 자신의 변화다. 노예는 주인과의 관계에서는 종속되어 있지만 자연과 사물을 변형하는 과정을 통해 자주성과 독립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주인은 노예의 노동으로 가공된 사물을 오로지 소비하고 향유한다. 노예의 노동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주인은 결국 자기에 대한 확신을 잃는다. 노예의 노동과 봉사는 현실 세계 속에 자신을 실현하는 방법이 되지만 주인에게는 이런 수단이 없다. 오직 노예의 노동 결과를 향유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역전되어버린다.
 노동을 통해 자기가 사물과는 다른, 독립적 의식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노예는 드디어 자신이 타자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노예가 원하는 것이 단지 주인의 자리에 올라서는 것이라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단순히 주인처럼 누리고, 누군가를 노예로 삼고자 한다면 결국 관계가 역전될 뿐 종속은 변하지 않는다. 이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비대칭적이고 불평등한 관계를 넘어서 대칭적이고 상호적인 관계가 필요하다.
 헤겔은 서로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가 없다고 말한다. 참된 자유는 나와 타자와의 동일성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타자가 나와 마찬가지로 자유롭고 또 나에 의해서 자유로운 존재로 인정될 때에만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자유는 상호 인정 없이는 불가능하다. 또한 현실에 직접 참여하는 노동 없이도 불가능하다.


- 김선희 저
- 철학이 나를 위로한다ㅣ예담ㅣ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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