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향연>에서 인간은 평생 겪어야 하는 사랑을 신화적으로 해명했다. 태초에 인간은 둘이 하나를 이룬 모습이었다. 이 짝패는 남자와 여자일 수도 있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일 수도 있다. 남성과 남성 짝은 태양의 자손, 여성과 여성 짝은 땅의 자손, 그리고 남자와 여자 짝은 달의 자손으로, 이들은 모두 부모를 닮아 둥글게 태어난다. 그러나 인간의 오만은 결국 신을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제우스는 불경죄를 저지른 인간을 벌하기 위해 이들을 둘로 나누어버린다. 본래 한 몸이었던 인간'들'은 제우스의 벌로 둘로 나뉘었고 그래서 인간은 애초부터 자신의 반쪽을 찾아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식으로 말하자면 사랑은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완전한 원으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플라톤에게 사랑은 결핍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 충동의 대상을 육체에서 지혜나 덕목, 더 나아가 신적인 아름다움에까지 확대해나가는 상승의 과정,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플라톤의 사랑은 탐식자의 사랑과 비슷해진다. 충동을 통한 상승, 확산의 역동성은 결국 자신의 결여를 보충하려는 끝없는 욕망과 같기 때문이다. 에로스의 문제는 비이성적이거나 육체적 갈망이라는 점이 아니라 자신의 결여를 메우기 위해 타자를 이용하는 보충의 과정이라는 점에 있다.
타자를 흡수한 뒤의 나는 타자를 흡수하고자 했던 때의 열정을 잃고 상승의 충동을 상실한다. 결여는 메워졌지만 나를 움직일 추동의 에너지가 사라진다. 잃어버렸다 다시 찾은 내 몸의 반쪽은 더 이상 기대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영혼의 반쪽이 아니라 내가 짊어져야 할 내 몸의 잉여일 뿐이다.
사회 제도가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보는 루소는 고독한 인간이 사회적 상태의 인간보다 더 우월하고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 자신과 세계 전체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고독한 인간은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타인의 의견에 의존할 필요도,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것을 자유라고 부르짖을 이유도 없다.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러한 자기충족성이 루소에게는 궁극적 선善이다.
루소가 경험한 사랑이란 결국 상대의 인격성을 지우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루소에게 사랑이란 타인이 나와 같은 주체가 아니라 그저 비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통해 타인을 자기의 삶에 허용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영원히 고독한 개인으로 살고자 했던 루소가, 타인에 대한 욕망과 자기 자신을 고독하게 유지하고 싶은 욕망을 동시에 해결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말하는 고독한 개인이란 결국 타인들로부터 자발적으로 고립된 상태가 아니라 타인을 불평등한 자리로 보내 그의 존재에 마음 쓰지 않을 수 있는 상태로 지내는 사람에 불과할지 모른다.
자기중심적인 쪽이 상대를 불평등한 자리에 놓고 축소하며 상대의 독립성과 주체성을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허감을 채우고 싶어 누군가를 끝없이 필요로 하면서도 타인과의 관계를 만들어 놓은 뒤에는 자기에게만 집중하면서 그를 내 안에 축소해버린다. 축소에 저항하지 않으면 나는 모든 것을 잃는다. 상대와, 그와의 사랑과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사랑이 투쟁이라면 그 대상은 연인이 아니라 서로를 축소하려는 각자의 욕망일 것이다.
공자孔子의 제자인 재아宰我는 '인仁한 사람이면 누군가 우물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그를 구하려고 우물에 들어갈 것인가'라고 질문한다. 만일 인이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면 자기를 희생하고라도 다른 사람을 구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만일 사람을 구하러 우물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라 어리석은 공멸에 불과할 것이다. 함께 들어간다고 해서 그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자는 이성적인 사고를 포함하고 자기를 방기하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랑은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책임, 자기 내면을 성숙시키려는 스스로의 노력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공자는 이 질문에 대해 인을 성취한 사람이라면 결코 우물에 따라 들어가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님을 알 것이라고 답한다. 인한 사람은 선의를 가지고 타인의 안위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동시에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인 맹목에 빠지지 않는다.
공자에 따른다면 사랑은 상대방에게 자신을 던져버리지 않고 또 자기만을 고집하지도 않는 균형에서 시작된다. 오직 자기를 보존하는 사람만이 상대의 표면이 아니라 깊이를 보고 그 깊이를 감당할 수 있다. 그래서 공자는 인에 대해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나중에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플라톤에게 사랑은 결핍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 충동의 대상을 육체에서 지혜나 덕목, 더 나아가 신적인 아름다움에까지 확대해나가는 상승의 과정,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플라톤의 사랑은 탐식자의 사랑과 비슷해진다. 충동을 통한 상승, 확산의 역동성은 결국 자신의 결여를 보충하려는 끝없는 욕망과 같기 때문이다. 에로스의 문제는 비이성적이거나 육체적 갈망이라는 점이 아니라 자신의 결여를 메우기 위해 타자를 이용하는 보충의 과정이라는 점에 있다.
타자를 흡수한 뒤의 나는 타자를 흡수하고자 했던 때의 열정을 잃고 상승의 충동을 상실한다. 결여는 메워졌지만 나를 움직일 추동의 에너지가 사라진다. 잃어버렸다 다시 찾은 내 몸의 반쪽은 더 이상 기대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영혼의 반쪽이 아니라 내가 짊어져야 할 내 몸의 잉여일 뿐이다.
사회 제도가 인간을 타락시킨다고 보는 루소는 고독한 인간이 사회적 상태의 인간보다 더 우월하고 자유롭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 자신과 세계 전체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고독한 인간은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타인의 의견에 의존할 필요도, 그들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 것을 자유라고 부르짖을 이유도 없다. 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러한 자기충족성이 루소에게는 궁극적 선善이다.
루소가 경험한 사랑이란 결국 상대의 인격성을 지우는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루소에게 사랑이란 타인이 나와 같은 주체가 아니라 그저 비인격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통해 타인을 자기의 삶에 허용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영원히 고독한 개인으로 살고자 했던 루소가, 타인에 대한 욕망과 자기 자신을 고독하게 유지하고 싶은 욕망을 동시에 해결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말하는 고독한 개인이란 결국 타인들로부터 자발적으로 고립된 상태가 아니라 타인을 불평등한 자리로 보내 그의 존재에 마음 쓰지 않을 수 있는 상태로 지내는 사람에 불과할지 모른다.
자기중심적인 쪽이 상대를 불평등한 자리에 놓고 축소하며 상대의 독립성과 주체성을 부정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허감을 채우고 싶어 누군가를 끝없이 필요로 하면서도 타인과의 관계를 만들어 놓은 뒤에는 자기에게만 집중하면서 그를 내 안에 축소해버린다. 축소에 저항하지 않으면 나는 모든 것을 잃는다. 상대와, 그와의 사랑과 심지어 나 자신까지도. 사랑이 투쟁이라면 그 대상은 연인이 아니라 서로를 축소하려는 각자의 욕망일 것이다.
공자孔子의 제자인 재아宰我는 '인仁한 사람이면 누군가 우물에 빠졌다는 말을 듣고 그를 구하려고 우물에 들어갈 것인가'라고 질문한다. 만일 인이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면 자기를 희생하고라도 다른 사람을 구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만일 사람을 구하러 우물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라 어리석은 공멸에 불과할 것이다. 함께 들어간다고 해서 그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자는 이성적인 사고를 포함하고 자기를 방기하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랑은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책임, 자기 내면을 성숙시키려는 스스로의 노력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공자는 이 질문에 대해 인을 성취한 사람이라면 결코 우물에 따라 들어가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 아님을 알 것이라고 답한다. 인한 사람은 선의를 가지고 타인의 안위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동시에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인 맹목에 빠지지 않는다.
공자에 따른다면 사랑은 상대방에게 자신을 던져버리지 않고 또 자기만을 고집하지도 않는 균형에서 시작된다. 오직 자기를 보존하는 사람만이 상대의 표면이 아니라 깊이를 보고 그 깊이를 감당할 수 있다. 그래서 공자는 인에 대해 '어려운 일을 먼저 하고 나중에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 김선희 저
- 철학이 나를 위로한다ㅣ예담ㅣ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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